2017년 9월 27일 수요일

선배/후배와의 대화 - 일체유심조2

어젯 밤에 우연치 않게 페이스 북에 보인 글이 있어 댓글을 남기다가 삼성에서 일할 때 알게된 유관부서 선배와 페이스북 챗을 통해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근황도 확인하고 덕담도 주고받던 중에, 오래 전에 그 선배가 저에게 했던 말이 기억나 그 당시의 이야기를 제가 꺼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갤럭시 노트 2 or 3, 혹은 갤럭시 S3 or 4 프로젝트를 하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제품이 성공적으로 런칭했고, 순조롭게 초도 판매가 시작된 이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력들이 모여 같이 회식을 하던 날이였죠.

프로젝트 기간 중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계획된 모든 것을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상당부분 진척이 있었고, 또 출시 후 반응도 좋았으며, 약간의 지연은 있었지만 hard deadline 이내에 완료되었기에 모두들 기분 좋은 상태였고, 특히나 HW/SW 개발 담당 수석님들은 다음 임원 인사 때 상무 승진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었죠.

어느정도 술자리가 무르익자 몇몇 개발팀 사람들은 수석님들께

"이제 곧 상무님 되시는거 아닌가요? '상무보' 라고 불러야 되는거 아닐까 모르겠는데요"

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기도 했었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술자리가 진행되고 저도, 또 그 선배도 상당한 량의 술을 마신 상태에서 갑자기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너희부서 사람들 다 좋아. 너 그것도 복이다. 다들 스마트한 것 같고. 업무 분야때문인지 몰라도 젊은 것 같다. 실제 나이도 다른 팀들보다 젊기도 하지만, 생각도 젊고, 무엇보다 부서에 공공의 적이 되는 꼰대가 없자나."

원래 젠틀한 성격에 후배에게 말 놓는 사람이 아닌데, 그 날 따라 술이 취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유관부서라도 직급이 낮으면 말부터 놓고보는 개발팀 수석님이 옆자리에 앉아 반말 바이러스를 옮긴 것인지 호칭도 '대리님'에서 '너'로 바뀌었고, 말도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뀌었습니다.

"생긴지 몇 년 안된 팀이자나요. 업무 R&R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긴 팀이라 일단 존재 자체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다같이 뛰다보니 그럴지도 모르죠."

"뭔소리야. 요즘 시기엔 너희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HW만 가지고 경쟁이 되나? 그리고, 할 일이 명확하지도 않은 팀을 회사에서 몇 년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삼성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필요하니까 조직이 계속 유지되는거지."

"뭐, 저도 그렇게 믿고싶은데, 매년 임원인사/조직개편 시즌되면 팀이 남느냐 없어지느냐 이야기 돌고, 또 매 년 팀 인원 반토막 나서 다른팀으로 이동되고 그러자나요."

"야 봐봐. 그게 너희 팀 없애려고 이동시킨게 아니자나. 너네가 빌드업 한 프로젝트가 구찌 커지니까 새로 전담 팀 꾸리던지, 더 큰 팀으로 옮기느라 그런거지. 너희가 잘 하니까 그렇게 분할되고 자꾸 그러는거자나."

"그래도 뭐랄까... 쓸데없는 일이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좀 저희 역할이 오버헤드 같기도 하고 그렇죠. 진짜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말이죠."

"진짜 쓸데없는 일이거나 오버헤드면 사람 반토막 나고나서 다시 1년 지나면 채워지고 그럴 수 있겠냐? 인사팀이 호구도 아니고."

"솔직히 각 부서의 업무들을 모아놓고 저희 부서의 업무들과 다른 부서의 업무들 중 교집합을 빼고나면 저희 부서에는 남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고유 영역이 없죠."

"고유영역? 야 그런게 어디있어. 개발/생산 같은 직접부서 빼면 원래 그런거 없어. 나라고 있을 것 같아? 상품기획? 따지고보면 우리가 뭐 밑바닥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게 어디있어? 다 디자인, 개발, 연구소, 해협에서 들고온 것들 하나로 엮는거지. 그렇게 따지면  우리라고 고유영역이 있냐? 넌 그게 문제야. 너 책임감도 있고, 그래서 같이 일하면 편한하긴 한데, 넌 주인의식이 없어. 가끔 넌 그냥 빵구 안나게 일하는 것 같아. 진취적이지 않아."

선배가 이 말을 했던 순간은 상당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책임감이 있는데 주인의식은 없다? 명확하게 우리가 주인인 업무가 없는데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안그래도 부서 이동 후 업무 성격도 잘 맞지않아 지속적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있던 상황인데다, 언젠가부터 갖고 있었던 회사 생활의 원칙, 'x 팔리지 않게 일하자' 를 나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영 거북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넌 그냥 빵구 안나게 일하는 것 같아.' 이라는 말은 정확히 정곡을 찔렀습니다. 비록 이 말을 했던 선배는 지금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저도 선배와의 대화 내용은 제 기억에 의거해 재구성을 한 것이지만 그 말만은 취중에 들었어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이 납니다.

저는 말 그대로 창피한 일이 터지지 않는 수준에서만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가능한 현재있는 자원들 중에 하나라도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만 관리를 했었고, 새로운 일에는 상당히 보수적으로만 접근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부서 내에서도 업무 영역은 크게 두 가지 였는데, 하나는 신규 서비스 기획/추진/개발, 다른 하나는 서비스의 유지/보수/관리/배포 였습니다. 원래는 모든 팀원들이 이 두 가지 업무 모두를 중첩해서 일하던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팀 내에서 업무영역을 기획담당, 매니징 담당으로 확실히 나누게 되었는데, 저는 그 때 매니징 업무를 선택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팀내에 새로운 프로젝트나 업무가 진행 될 때면 몇 번이고 업무 분할을 다시 했지만 저는 요지부동으로 기존 업무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고요.
매니징 그룹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유는 대외적으로는 저만의 전문영역에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제가 주인이 되는 업무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신을 업무에 투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저 매일매일 루틴한 업무를 해가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속 관리/모니터링하고, 만약에 사고가 터지만 관련 직접부서에 추궁을 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 보다는 지금 있는 것들이나 제대로 내보내자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당시 제가 얼마나 수동적으로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주로 플래그쉽 단말쪽에서 일했고, 다른 제품군의 경우 후배들이 담당을 했었습니다. 하루는 특화폰을 담당한 후배가 기존 서비스를 조금 변경하여 그 모델의 특성에 맞게 바꾸고자 유관부서 요청 공문을 보내기 위해 저를 찾았습니다.

제품 컨셉에 맞는 적절한 제안이였죠. 하지만 당시에 플래그쉽 모델을 타깃으로 메이져 버젼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였기에 저는 본 변경건으로 인해 제 모델의 일정에 영향이 갈 것을 먼저 우려했었고, 후배의 아이디어에 테클부터 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진짜로 우려하는 제 '모델 일정에 영향'을 제외한 다른 risk들을 하나씩 이야기 하고 후배와 제 우려들과 후배의 제안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하나씩 따지다가 후배가 저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대리님이 그걸 걱정해요? 그건 그 쪽 담당부서에서 고민하고 답변을 줘야하는 것이지 대리님이 왜 그걸 먼저 대신 걱정해주고, 그 걱정 때문에 먼저 우리의 요구사항을 스스로 제한하나요?"

갑자기 대낮에 벌거벗은 채로 강남대로에 서 있는 것 마냥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아니 그런건 아니고, 객관적으로 추진 가능한지 가능성을 미리 알아야 우리도 우리 컨택 포인트들에 이야기 할 때 톤을 정할 수 있으니까 그런거지..."

"거기서 힘들겠다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안할 것도 아니자나요. 어짜피 우리는 어떻게든 요청하고 안되면 이슈 레이즈하고, 보고하고 해서 일이 되도록 할꺼자나요. 그게 우리 할 일 아니에요?"

이번에는 원투 펀치를 맞은 것 처럼 어지러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우리의 할 일과 이 후배가 생각하는 우리의 할 일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후배의 말이 틀렸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고요.

이후로 저는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로기 상태에서 더 이상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이상한 말들을 내밷었습니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발생한 자기방어기제였는지, 무었이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이렇게 핑계를 대는 와중에도 스스로 이 말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웠습니다.

"그건 그런데... 이게 이 모델에 나가면 플래그쉽 모델 서비스가 이 모델보다 오히려 비교 열세가 되고, 주절주절주절... 그러면 플래그쉽 모델 서비스 기획도 갑자기 변경될꺼고, 주절주절주절... 또 그러면 이 모델 타깃 특화가 더 이상 아닌게 되고, 주절주절주절....."

결국 후배는 마지막으로 저에게 KO 펀치를 날렸습니다.

"그러면, 대리님이 안하신다면 저 혼자라도 공문 보내고 회의 소집할께요."

저는 넉다운이 되어 버린 숨긴채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같이 추진해 보자는 말을 남기고 휴게실로 갔습니다. 휴게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잔을 뽑아 놓고 후배와 주고받은 말들을 되새기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에는 후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괘씸한 것 같았고, '어디 해 봐라. 그게 되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음료수 한 캔을 다 마실 때 즈음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한 없이 부끄럽기 시작 했습니다. 저도 몰랐던 저의 속 마음을 후배의 말을 통해 제가 알게된 것 같았습니다.

'난 기획 담당자가 아니야. 그냥 기획되서 개발중인 것 들 잘 가져다 쓰면 되.'
'더 좋아지건 말건 난 모르겠고, 그냥 딱 계획된 것만 문제없이 탑재될 수 있게 하자.'
'지금도 바쁜데 일 더 벌려봐야 좋을 것 없어.'

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있었는데, 저는 제 마음도 모른채 후배의 제안에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였습니다.

그 때 시간이 밤 10-11시 즈음이였는데, 이미 시간도 많이 늦었고, 더 이상 일을 할 만한 상태도 아니였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캔맥주라도 하나 사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퇴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 상황에서 후배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 후배의 퇴근버스 막차 시간에 맞춰 30여분 가량을 휴게실에 더 머물러 있다가 사무실로 돌아 갔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제가 그 때에 조금 더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일을 했다면, 적어도 선배나 후배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라도 제 마음을 다잡고 일했다면 어땠을까요?

워낙 SW 개발 일을 좋아하고 즐기기에 여전히 마음 속에 무언가 2% 부족함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 지금 제가 저의 일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즐기듯이 그 때에도 제 업무와 새로운 도전들을 즐기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일이 너무 좋고, 도전과 그에 따른 성취감에 빠져 아직도 한국에서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건 제가 적극적으로 저의 업무를 대했다면 그 시절의 기억들은 지금보다는 더 좋은 추억들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부끄러움을 안겼었던 선배와 후배, 두 분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간간히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는 선후배나 동기들과 연락할 때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해 듣습니다. 두 분은 저에게 '넌 그냥 빵구 안나게 일하는 것 같아.' '그게 우리 할 일 아니에요?' 를 말 해주었을 때의 마음가짐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듯, 이미 조기 승진도 하셨고 지금도 회사생활을 아주 잘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은 인생의 스승이라고 하는데, 이 두 분은 적어도 다른 인연들 보다는 저에게 더 큰 가르침과 깨달음을 안겨준 스승들입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약 5년간의 시간은 한 때라고 말하기에는 커리어 빌드업의 기반을 다지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인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마음의 벽을 닫아 그 시기를 스스로 인생의 암흑기로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동시에 그 때의 고통과 시련이 지금 저를 캐나다로 인도했고, 캐나다에서 삶과 일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고마운 경험이라는 생각도 하고요.

삶에 있어서 모든 경험은 그 영향이 크건 작건 삶의 자산이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연하게 선배와 챗을한 덕분에 제 기억 깊은 곳에 있던 부끄러움 두 가지를 다시 꺼내오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 부끄러움을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러한 부끄러움이 없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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